공지사항

제4회 청강문학상 수상작 발표
  • 작성일 2025-10-29
  • 작성자 만화콘텐츠스쿨

안녕하세요.

제4회 청강문학상 수상작이 다음과 같이 선정되어 공지합니다.

대상 :

채x경, <서드 아이 홈리스>

 

우수상 :

심x현, <볼셰비키 혁명사>

 

장려상 :

형x림,  <레몬가의 노숙자>

김x주, <태양을 부술 때>

이x현, <영원한 환자>

 

가작 :

육x리, <시간 여행자>

박x민, <선데이 시네마>

이x연, <기억 세탁기>

 

총평

2025년 청강문학상은 처음으로 청강 재학생 외에도 외부인의 출품을 허용한 공모전이었습니다. 그 덕에 다양한 연령대의 경험과 시선, 다양한 소재로 풍요로워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올해 출품된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학적 상상력과 사회적 문제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SF적 설정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탐구하는 작품들이 두드러졌으며, 세대 간 갈등과 가족 관계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수상작들은 각각 독특한 문학적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상 수상작 <서드 아이 홈리스>는 SF적 상상력과 사회적 통찰을 잘 결합했으며, 우수상 <볼셰비키 혁명사>는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른 수상작들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노숙, 환경 디스토피아, 노인 학대)를 진지하게 탐구했습니다. 가작들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설정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완결성이나 주제의 깊이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모든 작품이 보여준 진지한 문제의식과 실험정신은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아깝게 최종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예선을 통과하여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을 고민하게 했던 작품으로는 <사원증> <누가 내 뼈를 훔쳐갔을까> <새하얀 세상에서 눈을 뜬다> <발아> <알려지지 않은 증상> <18시 11분의 버스> <퀘렌시아> <A를 찾아서> <등대와 고래> <넥타이를 사수하라> 등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하단에 심사평을 첨부합니다.

 

 

또한 이번에 제출된 작품들은 추후 청강문학상 홈페이지(https://cknovelcom.wordpress.com/)에 별도로 올라가게 되며, 이번 공지에서는 심사평만 공개됩니다.

다음은 심사평입니다.

 


 

대상: 채X경, 서드 아이 홈리스

외계 이민자 ‘삼목인’을 통해 소수자의 정체성과 사회 편입 문제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세 개의 눈을 가진 삼목인 ‘이수’가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고 개인으로 고립되는 과정은, 이주민이 겪는 문화적·정체적 단절을 은유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서드 아이(third eye)라는 제목의 중의적 함의가 특히 인상적이다. 물리적으로는 삼목인의 세 번째 눈을, 상징적으로는 타자를 바라보는 제3의 시선을, 그리고 ‘홈리스(homeless)’와 결합하여 공동체(home)를 잃은 존재의 비애를 표현한다. 삼안을 통한 내적 소통이 단절되었을 때 개인이 경험하는 고립감은,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를 상실한 개인의 소외를 SF적 장치로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서사 구조도 치밀하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의 화자가 이수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형식은, 소수자를 바라보는 다수자의 시선 자체를 성찰하게 만든다. 화자는 이수를 행운아라고 부르지만, 그 행운의 이면에 놓인 동화(assimilation)의 폭력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결국 이수가 삼목인 공동체에도, 인간 사회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서드 아이 홈리스’가 되는 결말은 이민자 문제의 본질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SF적 소재를 활용한 서술 방식이 재미있고 흥미롭다. 삼목인의 독특한 존재 방식을 설명하는 SF적 설정이 딱딱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설명과 서사가 균형을 이루며 읽는 재미를 더한다. 다소 실험적인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몰입도를 잃지 않으며, 가상의 장치를 현실 비유로 전환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문장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감각적이다. 현실의 이민자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이 아니라 SF적 거리두기를 통해 오히려 더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전략이 돋보이는, 사유의 깊이와 서사적 완성도, 그리고 읽는 즐거움까지 겸비한 수작이다.

 

우수상 : 심X현, <볼셰비키 혁명사>

학생운동의 퇴조와 과거 운동권 선배들의 변절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세대 간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 문제적 작품이다. 제목 ‘볼셰비키 혁명사’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역사서를 가리키는 동시에, 한국 대학가에서 일어났던 작은 ‘혁명’의 역사를 의미한다. 작품은 ‘밀려남’의 구조로 대학 공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신입생이 과방을 점유하면 고학번이 세미나실로, 동아리실로, 랩실로 밀려나다 결국 사회로 나가는 ‘피라미드 구조’는, 대학이라는 공간의 위계와 세대 교체의 냉혹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밀려나는 걸 괜히 즐기는 머저리들’로 남아 운동을 이어가려 한다. 핵심은 과거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선배들이 사회에 나가 변절하는 과정과, 그들에게 실망한 후배 세대의 냉소를 대비시키면서도, 결국 ‘혁명의 책’을 매개로 다시 연결되는 구조에 있다. 화자가 낡고 누런 <볼셰비키 혁명사>를 발견하는 장면은, 과거의 이상이 먼지 속에 묻혀 있지만 여전히 그곳에 존재함을 암시한다. 다소 올드하다면 올드하다 할 수 있는 정서와 문체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독특한 감수성을 만들어내며 시대적 분위기와 정서가 매력을 발산한다. 건조하면서도 풍자적인 문체가 어울린다. ‘케케묵은 운동권 선배들’, ‘감언이설과 밥’, ‘밀려나는 걸 괜히 즐기는 머저리들’ 같은 표현에서 화자의 냉소적 거리두기가 느껴지지만, 그 냉소 아래 배신감과 애정이 동시에 자리한다. 이념과 개인의 서사를 묘하게 뒤섞으며, 시대의 격변 속 인간의 허무와 욕망을 진지하게 탐색한다. 특히 E. H. 카(E. H. Carr)의 책이 상징하는 ‘역사’를 통해, 과거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성찰하게 만드는 구조가 정교하며, 묘사와 리듬의 감각이 인상적이다. 분량의 문제였겠지만 후반부의 전개가 다소 급하게 느껴지는 점, 그리고 선배들의 변절 과정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한국 학생운동사의 한 단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세대 간 단절과 연대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작품으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장려상 :형X림, <레몬가의 노숙자>

동화적 상상력과 사회적 현실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이다. 레몬가 4번지 공원의 노숙자 ‘마이클 윈터밀러’를 4살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서사는, 노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따뜻하고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구성과 내용, 연출 모두가 흥미로우며, 특히 공모 제시어인 ‘말끔한 노숙자’와의 결합이 매우 자연스럽고 효과적이다. 노숙자라는 소재를 단순한 사회적 시선이 아니라 미학적 거리감으로 다뤄, 삶의 균열과 존엄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작품의 강점은 화자의 순진한 시선과 독자가 감지하는 비극 사이의 간극에 있다. 아이는 윈터밀러 씨를 ‘친절하고 준수하게 생긴’ 사람으로 기억하지만, 독자는 그의 ‘단정한 정장 차림’과 ‘공원 의자에서의 잠’이라는 대비를 통해 몰락한 중산층의 비극을 읽는다. 특히 ‘윈터(Winter, 겨울)’라는 이름이 차가운 현실을 상징하면서도, 아이가 그를 따뜻한 ‘밀러 씨’로 부르는 장면은 이름의 의미를 전복시킨다. 과거 윈터밀러 씨에게 가족이 있었다는 설정, 그리고 그가 여전히 정장을 고집하는 모습은 상실과 자존심의 문제를 섬세하게 다룬다. 레몬가라는 공간적 배경, 아이의 성장에 따른 시간적 흐름, 그리고 윈터밀러 씨를 둘러싼 동네 사람들의 반응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입체적인 서사를 완성한다. 스토리의 흐름과 시각적 묘사가 조화를 이루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아이의 순수한 시선이 어른이 되면서 점차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과정이 더 깊이 있게 전개되었다면 완성도가 높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노숙이라는 사회 문제를 동화적 감수성으로 풀어낸 시도 자체가 신선하고, 레몬가의 햇살 같은 따뜻함이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다.

 

장려상 김X주, <태양을 부술 때>

디스토피아적 배경과 부자 관계의 심리를 결합한 SF 소설이다. ‘인공 태양’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아버지가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떠나고, 어린 주인공이 “네”라고 대답한 것을 평생 후회하는 이야기는 언어의 폭력성과 무책임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태양은 정말 지긋지긋하지?”라는 아버지의 질문에 아이가 의미도 모른 채 “네”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어른들이 아이에게 강요하는 동의의 허구성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언어가 ‘포장지가 둘둘 말린 택배처럼 두루뭉술하고 불편’하다는 표현은 탁월하다. 어른의 언어는 ‘교묘하고 간사하게 중요한 부분을 가린다’—바로 죽음을 말이다. 아버지가 우주에서 공중분해되는 장면을 생중계로 보는 트라우마, 그리고 그 순간 터진 코피는 신체가 기억하는 충격을 상징한다. 이후 주인공이 말을 하지 않게 되는 설정은 언어에 대한 불신과 책임의 무게를 형상화한다. “고작 한 음절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말”이라는 깨달음은 이 작품의 핵심 테제다. 젊은 감각으로 청춘의 폭력성과 불안을 표현했으며, 문장의 리듬이 경쾌하고 가독성이 뛰어나 이야기 전개가 자연스럽다. 읽는 재미가 있고 전체적으로 에너지와 생동감이 돋보인다. 다만 인공 태양의 세계관이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면, 그리고 주인공이 침묵을 깨고 다시 말하게 되는 과정이 그려졌다면 서사의 완성도가 높아졌을 것이다. 후반부의 반전이 다소 전형적이라 아쉬움이 남지만, SF적 설정과 성장소설의 요소를 결합하여 언어와 책임의 문제를 독창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평가된다.

 

장려상 이X현, <영원한 환자>

정신질환과 노인 학대, 그리고 세대 간 상처의 대물림을 다룬 무거운 작품이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유골함을 끌어안고 매일 밤 곡하는 집에서 자란 손녀 ‘지연’의 이야기는, 애도가 병리적 집착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냉정하게 묘사한다. 작품의 제목 ‘영원한 환자’는 다층적 의미를 지닌다. 신체적 질병으로 죽은 할머니, 할머니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그 관계를 목격하며 자란 지연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환자’다. 나르시스 설화를 도입부에 배치한 것은 자기애와 집착의 파괴성을 암시하는 효과적인 장치다. 특히 지연이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후련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장면은 충격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다. 피해자인 동시에 목격자였던 지연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은 해방이다. “시체처럼 지내셨다”는 표현은 할아버지가 이미 죽은 자로서 살았음을, 그리고 실제 죽음이 오히려 그 고통을 끝낸 것임을 암시한다. 신체와 존재의 경계를 다루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인상적이며, 병과 욕망, 고통과 구원을 독창적인 서술로 엮어낸다. 문체의 밀도가 높고, 불안한 정조를 세밀하게 제어한 점이 높이 평가되며, 결말의 여운이 강하게 남는다. 다만 할머니의 죽음과 할아버지의 집착 사이의 구체적인 서사가 더 필요하고, 지연의 심리적 변화 과정이 더 섬세하게 그려졌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 세대의 애도와 젊은 세대의 트라우마를 교차시켜 가족 내 폭력의 순환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이다.

 

가작 육X리, <시간 여행자>

시간 여행이라는 SF 소재를 ‘부작용’이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시간을 거슬러 갔다 오면 입술이 붓는 등의 부작용이 생긴다는 설정은 참신하며, 시간 여행자 훈련생들의 일상을 그린 학원물 구조도 흥미롭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 주름을 세고 그만큼 성냥 켜기’ 같은 부작용 해소법은 시적이면서도 기발하다. 특히 주인공 혜안이 자신의 시간 여행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모습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압박을 은유한다. 선배 수완과의 관계도 잘 설정되어 있다. 시간 개념을 유머러스하게 비틀며, 의외의 전개로 흥미를 끈다.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급격하게 전환되고 로맨스가 갑작스럽게 등장하지만, 그 뜬금없음이 단점이면서도 작품의 개성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장르적 재미를 추구한 발상 자체가 신선하다. 다만 시간 여행의 메커니즘과 부작용의 원리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었다면, 그리고 주요 사건이 더 극적으로 전개되었다면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졌을 것이다. 제출된 부분이 도입부에 가까워 전체 서사를 평가하기 어렵다는 점도 아쉽다. 그러나 SF적 상상력과 캐릭터 설정은 충분히 매력적이며, 발전 가능성이 큰 작품이다.

 

가작 박X민, <선데이 시네마>

인터랙티브 영화라는 SF적 소재와 관람 중독이라는 사회 문제를 결합한 작품이다. ‘스티커(뇌파접속단말기)’를 통해 관객의 취향에 맞춰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영화는, 현대의 알고리즘 추천 시스템과 콘텐츠 중독 문제를 예견한다. 주인공 ‘하임’이 인터랙티브 공포영화에 중독되어 눈을 감아도 영상이 재생되는 상태에 빠지고, 아버지가 스티커를 가위로 조각내는 장면은 미디어 중독과 가족 갈등을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화자가 하임의 꿈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욕망은, 타인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그 불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영화적 감수성과 장면 전환 중심의 구성은 흥미롭고, 시각적 이미지와 감정의 파편을 엮어내려는 시도 자체는 실험적이다. 다만 인터랙티브 영화 중독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구체적 영향이 더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은 점, 그리고 하임과 화자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후반부 서사가 명확하지 않아 전달력이 떨어지는 점이 아쉽다. 제출된 부분만으로는 SF적 설정의 흥미로움에 비해 완결성이 다소 떨어지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미디어와 중독에 대한 문제의식은 시의적절하며, 설정의 독창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가작 이X연, <기억 세탁기>

‘세탁기에 사람을 넣는다’는 초현실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이미지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없었던 일로 생각을 세탁하다”는 세탁기 광고 카피를 문자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설정은 블랙코미디적이면서도 전율을 준다. 화자인 상담사에게 아이가 털어놓는 이야기-엄마를 세탁기에 넣었다는 고백-는 학대받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의 극단적 판타지이자,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다. 엄마가 팔을 긁으며 고함을 지르는 장면, 이웃들의 수군거림, 그리고 아이가 구석으로 숨는 모습은 가정 폭력과 정신질환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린다. 특히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단정한 아이의 외양과, 그가 털어놓는 끔찍한 이야기 사이의 대비가 효과적이다. ‘겨울 교복을 입은’ 아이가 ‘더운 여름’에도 옷을 갈아입지 못한다는 디테일은 방임의 증거다. 기억을 지우는 장치를 중심으로 한 호러 서사로, 공포와 감정의 경계를 잘 짚어낸다. 간결한 문체 속에 불안과 공허가 서서히 드러나며, 결말의 반전이 특히 인상적이다. 장르 문학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 돋보인다. 다만 ‘세탁기에 엄마를 넣는다’는 이미지가 지나치게 극단적이어서, 독자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판타지인가 실제인가, 아니면 아이의 망상인가? 이 모호함이 의도된 것이라면 성공적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서사의 리얼리티를 해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아동 학대와 트라우마라는 무거운 주제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다룬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추가로 심사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치열한 논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들이 있습니다. 아까운 점수 차로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각각 독특한 개성과 성취를 저희에게 보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추가로 심사평을 남깁니다.

 

강X영, <사원증>

대기업 경비직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한국 사회의 체면과 자존심, 그리고 ‘좋은 직장’의 환상을 날카롭게 해부한 작품. 제목의 ‘사원증’은 아버지가 목숨처럼 여기는 상징이자, 그를 옥죄는 족쇄다. 작품의 핵심은 아버지가 대기업 경비로 일하면서도 마치 정규직 사원인 것처럼 행세하는 이중생활에 있다. “칼날처럼 날이 선 바짓단과 물방울 하나 튄 자국 없는 검은 구두”로 대표되는 아버지의 완벽한 외양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연기다. 특히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에게 “아들이 착해서 제가 편하죠”라며 아들을 과시하는 장면은, 아버지가 아들을 은연 중에 ‘자기 포장의 도구’로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아들이 아버지의 회사를 찾아가 경비복을 입은 아버지를 목격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다. “늘 상상해왔던 모습 그대로”라는 표현에서, 아들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확인하고 싶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아들이 느끼는 감정이 분노가 아니라 환멸과 슬픔이라는 점이다. 특히 아버지의 방을 탐색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텅 빈 방, 갑옷처럼 걸려 있는 양복들, 먼지 쌓인 책상”은 아버지가 실제로는 이 집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 이곳이 단지 ‘좋은 사람’이라는 배역을 연기하기 위한 분장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겉모습만 그럴싸한 노숙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의 존재를 정확하게 요약한다. 작품이 탁월한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단순히 비난하거나 연민하는 것이 아니라, 양가감정 속에서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밤에 거실에 쓰러진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가 감당해왔고, 또 앞으로도 감당해야 할 그 기나긴 노숙을 가늠해볼 뿐”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한국 사회에서 체면을 지키며 산다는 것의 고통스러운 무게를 담고 있다. 어머니 캐릭터가 거의 등장하지 않아 가족 구조가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못한 점, 그리고 아버지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과거 서사가 더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론적으로 한국 중산층의 체면 문화와 직장 위계, 그리고 아버지-아들 관계의 심리를 깊이 있게 탐구한 수작이다. 대상 수상작 ‘서드 아이 홈리스’와 마찬가지로 ‘노숙자’라는 주제를 다뤘으나, 이 작품은 SF적 우회 없이 현실을 직시한다는 점에서 강렬했다. 최종심에서 치열한 논쟁 끝에 아쉽게 수상을 놓쳤지만, 리얼리즘적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강x새, <누가 내 뼈를 훔쳐갔을까>

장애를 가진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와 질병의 경계에서 살아온 삶을 고백한 강렬한 작품. 제목 “누가 내 뼈를 훔쳐갔을까”는 선천적 질환으로 인해 ‘정상적인’ 성장을 빼앗긴 화자의 상실감을 은유한다. 작품은 사향 거북이의 생태로 시작한다.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거북이”, “익사하는 거북이”라는 역설적 존재는 화자 자신의 은유다. 거북이가 물에서 살아야 하지만 깊은 물에서는 익사하듯, 화자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 사회는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 “마치 광대처럼” 우스꽝스럽게 발버둥치는 모습이라는 자조적 표현은 고통스럽다. 특히 학교 시스템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대목이 날카롭다. “단지 몸이 약한 것일 뿐이라고, 의지박약이라고, 꾀병이라고, 거짓말이라고 했다”는 문장은, 장애와 질병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치부하는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오해 받을 짓을 한 사람도 책임이 있다”며 피해자를 도둑으로 몰았던 교사의 말은, 교육이 아니라 ‘계엄’이었다는 화자의 진단을 뒷받침한다. “학교는 내게 물 속이었다. 감옥이었다”는 표현, 그리고 “장애와 질병의 경계에서 나는 자주 불심검문을 당했다”는 문장은 시적이면서도 정확하다. 화자는 ‘정상’도 ‘장애’도 아닌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중학교 입학식 첫날부터 성적으로 매를 맞는 장면, 한문 숙제를 하는 데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디테일, 시력이 점점 떨어져 신호등도 보이지 않게 되는 과정 등은 생생하고 절실하다. “그 고통에는 이름이 없었다”는 표현은, 희귀질환의 사회적 비가시성을 정확히 포착한다. 다만 자전적 고백의 형식이 때로 산만하게 느껴지는 점이 다소 아쉽다. 최종적으로 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로 한국 사회의 비장애중심주의와 능력주의를 고발한 용기 있는 작품이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증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이 작품의 존재 자체가 의미 있다.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소수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필요한 작품일 것이다.

 

김X은, <새하얀 세상에서 눈을 뜬다>

우울증의 ‘알려지지 않은 증상’으로 날개가 돋는다는 초현실적 설정으로 시작하는 작품. 판타지적 요소와 청소년의 심리를 결합하여,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작품의 백미는 우울증이 날개로 가시화된다는 설정이다. “이 날개는, 우울증의 알려지지 않은 증상이다”는 선언은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롭다. 날개는 전통적으로 자유와 초월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병리적 증상이다. 이 전복된 상징성은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경험하는 이중성-겉으로는 특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통스럽다-을 표현한다.

주인공 소영이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는 설정도 중요하다. “모난 돌이 되지 말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던 소영에게 날개는 원치 않는 ‘다름’의 표지다. 옥상 열쇠를 통해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듣게 되는 과정은, 억압된 욕망과 자아의 발견을 상징한다.

“가벼운 우울증입니다”라는 한 선생의 진단은 역설적이다. 날개라는 극적인 증상을 가볍다고 부르는 것은,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의 무감각을 풍자한다. 소영이 자신의 날개를 쓰다듬는 한 선생의 손길에서야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깨닫는 장면은, 자기 내면의 고통을 타인을 통해서만 인식하게 되는 현대인의 소외를 드러낸다.

후반부에서 소영과 다른 인물이 함께 “새하얀 세상에서 눈을 뜬다”는 장면, 그리고 “저는 멋진 사람이니까! 죽으면 안돼요!”라는 외침은 우울증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날개가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다만 초현실적 설정과 현실적 서사 사이의 균형이 불안정하고, 날개의 의미가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나는 점이 아쉽다. 전체적으로 정신질환을 판타지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시도는 신선하며, 청소년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한 점이 훌륭하다. 설정의 독창성은 높이 평가하지만, (분량 문제였겠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서사의 깊이를 보완한다면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김X한, <발아>

임신이라는 거짓말을 통해 관계를 연장하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애착과 의존, 그리고 자기 파괴의 심리를 탐구한 작품. 제목 ‘발아’는 씨앗이 싹트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거짓말과 집착이 싹트는 과정을 은유한다.

작품은 “습기에 젖어 무겁게 내려앉은 재의 색” 같은 회색 하늘로 시작한다. “칙칙함은 싱크대 안쪽에, 전등 안의 죽은 벌레 사체에, 싸구려 세제 냄새에 깊이 물들어” 있는 공간 묘사는, 주인공의 관계와 내면의 부패를 암시한다. “모든 것이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는 문장은 압도적이다.

남자친구 민석이 바람을 피운다는 증거를 발견한 순간, 주인공이 느끼는 것은 배신감이나 분노가 아니라 불안이다. “또다시 혼자가 된다는, 이 세계에 나 혼자 버려진다는 그 지독한 불안”은 주인공의 애착 문제를 정확히 포착한다. 그리고 그 불안이 임신했다는 거짓말로 이어지는 과정은 소름끼치도록 현실적이다.

특히 “오래전 나를 노려보던 엄마의 얼굴이 어른거렸다”는 플래시백은, 주인공의 불안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기인함을 암시한다. 민석의 적반하장 반응과 주인공의 거짓말이 교차하는 장면은 독성 관계의 역학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발아’라는 제목은 다층적이다. 실제로 임신한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 싹트는 것, 그리고 그 거짓말이 점점 자라나 주인공을 옥죄는 과정을 의미한다. 또한 주인공 내면의 병적인 의존이 발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만 작품이 제출된 부분만으로는 전체 서사를 파악하기 어렵고, 거짓 임신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힘들다는 점이 아쉽다. 엄마와의 관계, 민석과의 과거 등 배경이 더 구체적으로 그려졌다면 주인공의 심리가 더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독성 관계와 병적 애착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으로, 어두운 내면을 직시하는 용기가 돋보인다. 공간 묘사의 감각이 뛰어나며, 심리 묘사가 예리하다.

 

김x진, <알려지지 않은 증상>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증상을 겪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의 소외와 비동시성을 탐구한 작품. 제목의 ‘알려지지 않은 증상’은 의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병이면서,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 타인과 시간을 공유하지 못하는 존재론적 고립을 의미한다.

작품은 친구가 “너 어디 아파?”라고 묻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아픈지도 모르고, 친구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 머리로는 지금 전개를 못 따라가겠다니까?”라는 내면 독백은, 주인공이 타인과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보건실에서 미열 판정을 받는 장면은 중요하다. “진짜 아픈 거였다니…!”라는 주인공의 반응은, 자신의 몸 상태조차 타인의 진단을 통해서만 인식하는 소외를 보여준다. “가끔 남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이 있으니 그런 건가보다”는 문장은, 자기 인식의 불가능성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교실에서 수학 문제를 풀 때 “안쪽이 빈 듯 텅텅 소리를 내며” 칠판 위로 글자가 적힌다는 묘사는, 주인공의 지각이 비어있음을, 세계가 의미를 잃고 기호로만 존재함을 드러낸다. “저쪽은 오목을 뒀던 곳, 그쪽은 아무 말 쪽지를 적었던 곳”이라는 공간 인식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흔적으로만 세계를 인식하는 주인공의 시간성을 보여준다.

작품의 가장 큰 강점은 ‘느린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인 감각과 장면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이다. 친구의 심장 박동을 손목에서 느끼는 장면, 칠판의 글자가 텅텅 소리를 내는 장면 등은 감각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이다. 다만 알려지지 않은 증상’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주인공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가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제출된 부분이 도입부에 가까워 전체 서사를 파악하기 어렵다. 전체적으로는 시간의 비동시성과 존재론적 소외를 감각적으로 포착한 작품으로, SF적 상상력과 심리 묘사가 조화를 이룬다. 감각적 묘사의 수준이 매우 높다.

 

이x현, <18시 11분의 버스>

여의도 증권가의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관찰한 한 남성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과 실존을 탐구한 작품. 제목의 ’18시 11분’이라는 구체적 시간은, 퇴근이라는 일상적 순간의 규칙성과 반복을 암시한다.

작품의 백미는 버스 정류장의 풍경 묘사다. “유리벽을 미끄러져 나온 형광등의 반짝임이 차양을 타고 퇴근자들의 얼굴에 얇게 깔린다”는 문장은 시적이면서도 정확하다. “몸에서 업무의 각이 하나씩 빠져나오는 시간”이라는 표현은, 노동이 신체를 얼마나 구속하는지를 보여준다.

화자가 관찰하는 ‘말끔한 노숙자’는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다. “신발엔 광이 났지만 앞코 가죽이 가늘게 갈라져 있었고 바짓단은 잘 다려졌지만 맨 아래 시접에서 실이 한 올 튀어나와 있”는 디테일은, 겉으로는 말끔하지만 세월의 마찰이 남아있는 중산층 몰락자의 초상이다. “정해진 주소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아침마다 씻고 면도하고 옷깃을 잠그는 사람”이라는 묘사는 체면과 자존심으로 버티는 삶을 압축한다.

특히 “디지털 화면에 기대어 동가식서가숙이 일상이 된 증권인”이라는 표현이 탁월하다. 그는 물리적 집이 없어도 주식 차트라는 디지털 공간에 ‘거주’한다. “캔들 차트의 빨강과 파랑의 봉우리와 골짜기”는 그의 삶의 기복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가 의지하는 유일한 세계다.

화자가 퇴근자들의 얼굴을 관찰하며 “오늘은 저 파란 투피스의 아가씨는 매도 시기를 잘 잡았구나”를 파악할 수 있다는 설정은 흥미롭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감정이 주가에 종속되어 있음을, 그들의 정체성이 투자 성공 여부로 결정됨을 암시한다. 아주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말끔한 노숙자’에 대한 관찰이 더 깊이 있게 전개되지 않은 점, 그리고 화자와 그 남성 사이의 관계나 교류가 없어 서사가 정지된 느낌인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접점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럼에도 이 작품은 관찰자 시점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으로, 문장의 감각이 돋보인다. 특히 공간과 인물 묘사의 수준이 높아서 읽으면서 즐거웠던 작품이었다.

 

임x수, <퀘렌시아(Querencia)>

6년 연애 끝에 이별한 여성이 지하철 역사의 노숙자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성찰하는 이야기. 제목 ‘Querencia’는 스페인어로 투우사가 소가 쉬는 장소, 즉 ‘안식처’를 의미한다. 작품은 이별 후 감정적 공허함을 느끼는 주인공이 어디에도 안식처를 찾지 못하는 상태를 탐구한다.

작품의 핵심은 주인공 지윤이 자신을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라고 의심한다는 점이다. 6년 연애가 끝났는데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 외에 다른 감상이 없는 자신에게 당황한다. “견고하게 쌓아 올렸을 줄 알았던 6년이란 세월은 돌아보니 파도치는 모래사장의 모래성일 뿐”이라는 깨달음은 쓸쓸하다.

지윤이 매일 지나치는 지하철 역사의 노숙자들에게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숙자들은 데게 움직이지 않는다. 돈을 구걸하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땅만 바라보고 있거나,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해 허공만 바라볼 뿐”이라는 묘사는, 지윤 자신의 정서적 상태를 투영한다. 그녀 역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모르는 ‘감정적 노숙자’다.

“한번도 말을 건 적은 없었다”는 문장이 상징적이다. 지윤은 노숙자들과 매일 마주치지만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는 그녀가 연인과 6년을 함께했지만 진정으로 연결되지 못했던 것과 평행한다. 퀘렌시아, 즉 안식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정서적 연결에서 찾아야 하는데, 지윤은 그것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친구 진아가 “걔는 어쩜 그렇게 한결같냐?”고 말하는 대목도 중요하다. 지윤의 한결같음은 안정성이 아니라 감정적 무감각의 증거다. 전 남자친구 민성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다. 만약 노숙자와 주인공의 연결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리고 주인공의 감정적 무감각의 원인이나 극복 과정이 구체적으로 전개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분량 때문이겠지만 제출된 부분이 설정과 상황 제시에 그쳤다는 인상이다. 분량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최종적으로, 현대인의 감정적 무감각과 관계의 어려움을 노숙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탐구한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제목의 의미를 잘 활용한 작품이다.

 

최x인, <A를 찾아서>

친구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은 증상’과 능력의 발견이라는 SF적 설정을 만나는 작품. 방탈출 카페 같은 공간에서 TTS 목소리의 지시를 받으며 미션을 수행하는 형식이 독특하다.

작품은 평범하게 살던 친구 A가 갑자기 “말할 수 없는 병”, “알려지지 않은 증상”을 SNS에 올리다 실종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경찰로부터 번아웃으로 자발적 실종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듣지만, 이상한 공간으로 초대받으면서 진실에 접근한다.

특히 “자기 재능을 다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라는 A의 질문이 핵심이다. “조선시대 사람이 프로게이머의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 해도, 그 사람은 자기 재능이 뭔지도 모르고 죽지 않았을까”라는 가설은 흥미롭다. 능력이란 시대와 환경에 의해 발견되거나 묻히는 것이며, 각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능력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는 설정은 SF적으로 매력적이다.

방탈출 형식의 미션 수행 구조도 참신하다. TTS 목소리가 지시하는 미스터리한 공간, “당신 머리 위로 조명이 떨어지기 전에 닥치고 시키는대로 하시는 게 좋겠죠?”라는 위협적 분위기는 긴장감을 조성한다. 다만 분량이 짧은 공모전에 제출하기에는 설정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산만하게 제시되어, 독자가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A의 실종, 알려지지 않은 증상, 능력 발견, 방탈출 미션 등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명확하지 않다. 제출된 부분이 도입부에 가까워 전체 서사의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다. 전체적으로 SF적 설정은 흥미롭지만, 만약 장편 공모전이었다면 그것을 뒷받침할 세계관과 서사 구조가 더 치밀하게 구축할 수 있었기에 더 유리했을 것이다.

 

최x용, <등대와 고래>

등대지기로 일하던 과거의 경험과 현재 화가로 살아가는 삶을 교차시키며, 예술가의 소명과 고독, 그리고 희망에 대해 성찰하는 작품. 제목의 ‘등대’는 화자의 과거를, ‘고래’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징을 의미하는 듯하다.

작품은 4월의 숲에서 새를 스케치하는 화가의 현재로 시작한다. “찢겼던 흔적이 역력한 지저분한 노트”를 언급하며, “왜 원래의 노트를 찢게 되었고 찢어진 곳에 다시금 새로운 종이를 덧붙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 “뜻깊은 추억”에는 “화가의 꿈을 포기한 채, 좌절하고 번민하던 시절의 무기력함”이 담겨 있다.

등대지기 시절의 묘사가 압도적이다. “표면의 페인트가 거의 벗겨져서 기분이 나쁘고 지붕은 녹슬어 누렇게 된 늙은 등대”, “검은 바위”, “짙은 해무”, “거친 파도”로 이루어진 공간은 고립과 고독의 상징이다. “닦아도 닦아도 깨끗하지 않아 어딘지 씁쓸하게 느껴”지는 등명기는, 화자의 내면 상태를 반영한다.

“이따금 나는 바다에서 배들의 기척”을 살피는 화자의 모습은, 고독 속에서도 타인과의 연결을 갈망하는 예술가의 자화상이다. 등대가 배들을 인도하듯,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타인에게 길을 비춰주는 존재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좌절하고 번민하던 시절”에서 “쪼그라들고 흐릿해졌던 꿈의 씨앗으로부터 꽃을 피워” 지금에 이르게 된 과정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기대되나, 제출된 부분만으로는 서사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초단편 공모전이 아니라 중장편 공모전이었다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긴 글로 쓰기에 유리한 설정의 작품으로, 고래라는 존재가 어떻게 등장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밝혔다면 더 치밀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문장의 서정성과 분위기 조성은 탁월하다.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노트, 등대의 고독, 숲에서의 평화 등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중장편으로 방향을 바꿔 전체 서사가 완성된다면 예술가의 성장담으로서 깊이 있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홍x서, <넥타이를 사수하라>

지구와 식민 행성 ‘아타 별’을 배경으로, 넥타이를 지키는 서바이벌 게임을 통해 계급 사회의 폭력성을 풍자한 SF 작품. 제목의 ‘넥타이’는 문명과 체면의 상징이자, 역설적으로 인간을 옥죄는 족쇄를 의미한다.

작품의 설정이 흥미롭다. 지구 방출생을 선발하기 위해 우주 정거장에서 벌어지는 게임은, 넥타이를 목에 건 채로 버티는 것이다. “넥타이가 가슴팍 밑으로 풀어헤쳐지면 선발에서 제외”되는 규칙은 단순하지만, 그 속에 계급과 체면의 폭력이 내포되어 있다.

주인공 고성이 “검정으로 아무 무늬도 없”는 넥타이를 선택한 이유가 중요하다. “남들 눈에 띄는 넥타이를 골라서 불리한 게임을 할 이유는 없”다는 판단은 생존 전략이자, 눈에 띄지 않기 위한 자기 보호다. 반면 “야광에 눈부신 펄이 박힌” 넥타이를 고른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고성의 평가는, 체면과 개성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아타 별’의 설정도 날카롭다. “지구 종말을 대비해 새로 개발에 착수”했다가 “지구의 지속 가능성이 증명되자마자 버려”진 행성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쓸모없어진 인간들이 버려지는 공간의 은유다. 낙오자들의 행성이라는 표현은 직설적이다.

고성의 외삼촌이 항상 술에 만취한 채 아타 별을 방문하는 설정, 그리고 고성의 어머니가 아파트 공사 중 실족사한 과거는 식민 자본주의의 폭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살아갈 거라면 지구에서. 맨정신으로 여기서 사느니 평생 알코올에 시달리기를”이라는 고성의 다짐은 쓰라리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게임의 규칙과 전개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아, SF로서의 긴장감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넥타이를 지키기 위해 참가자들이 어떤 전략을 쓰는지,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등이 그려져야 서사가 살아날 것이다. 중장편에 좀 더 유리한 설정이라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넥타이라는 일상적 사물을 계급 투쟁의 상징으로 전환한 상상력은 참신하며, 식민주의와 계급 문제를 SF로 풀어낸 시도는 의미 있다. 설정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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