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판도라, 그녀와 함께 보기
  • 작성일 2012-04-12
  • 작성자 Chungkang

<판도라(Pandora)>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1896

 

인류 최초의 여자는 판도라이다.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발명왕이자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여신의 모습을 따라 만들었단다. 물론 그리스신화에서의 얘기다. 제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게 분노했다. 제우스는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면 낳게 하는 사이코 같은 잔인한 벌을 주고도 부족하여 그 불을 받은 인간 세상에도 재앙을 내리고자 했고 그래서 만들도록 한 것이 바로 판도라이다.

 

중요한 임무가 주어진 만큼 신들은 그녀에게 최상의 선물들을 주어 보낸다. 아프로디테는 성적 아름다움과 욕망을, 헤르메스는 지략과 뛰어난 화술을, 아테나는 방직기술을 주었다. 그래서 판도라는 바로 ‘모든 선물을 가진 여인’이라는 의미다. 부러운 여인이다. 드디어 제우스의 음모가 시작되고 ‘미리 아는 자’라는 뜻의 이름인 프로메테우스는 ‘나중에 아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의 선물을 받지 말라고 경고한다. 역시나 어리석은 아니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동생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인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한다.

 

형의 경고를 두려워한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가 가져온 제우스의 결혼선물 상자를 보고 절대 열지 말 것을 판도라에게 당부한다. 궁금함이 더해가는 우리의 순진한 판도라. 절대 유혹 앞에 우리는 왜 더없이 약해지는 걸까? 견디다 못한 그녀가 드디어 상자를 여는 순간 상자 속에 있는 제우스의 나쁜 심보가 순식간에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질병과 슬픔, 증오와 시기, 가난과 전쟁, 그 밖의 수많은 악(惡)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모든 재앙은 다 빠져 나가 버리고 한 가지만 남았더란다.

바로 희망이었다.

 

 

판도라,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인

참을 수 없는 유혹에 힘없이 허물어지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은 장르를 불문한 예술의 영원한 주제였다. 19세기 영국 화가인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는 그 유혹에 결국 무릎 꿇으며 상자의 뚜껑을 살며시 열어 보는 판도라의 모습을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로 그려냈다. 유혹 앞에 순진하다 못해 단순해져 버리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역설적으로 아름답게 재현해 내며 아름답기에 그 모든 죄가 용서될 수 있다고, 아니 아름답기에 그 유혹을 견뎌낼 수 없었다고 그녀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물 흐르듯 반쯤 흘러내린 머릿결과 옷 사이로 드러난 뽀얀 백옥 빛 살결과 순진무구해 보이는 소녀의 얼굴. 그녀 자체가 바로 견딜 수 없는 유혹의 원천이었다. 이로서 판도라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인류 최초의 여자이다. 여자는 모든 죄의 근원이다. 이것이 19세기 유럽의 남성중심주의 사회구조의 기본 관점이다. 판도라는 사악하고 간교한 여자이며 동시에 의지박약의 어리석은 여자이고 본시 열등한 존재로 치부되고 말았다. 졸지에 남성우월주의의 희생양이 되고만 판도라. 19세기 말, 유럽예술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 팜므 파탈(femme fatale, 치명적인 여인, 요부), 즉 남자 망치는 여인의 원조가 된 판도라는 결국 세기 말, 급격히 바뀌어 가는 여성들의 의식변화를 두려워했던 어리석은 남성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환상이었다. 그러나 잊지 말자. 상자 속에 남아 있는 한 가지를. 혹자는 그것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기에 인류에게 희망은 없다고 얘기하거나 혹은 나쁜 것 다 내보내고 마지막 좋은 것 한 가지는 못 나오게 닫아 버린 판도라의 사악함을 탓할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상자 속에 남아 있기에 희망은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것마저 다른 것들과 함께 세상에 나와 버렸다면 이미 희망은 희망이 아닌 것이리라. 아직 갖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향해가는 가운데 우리는 이미 밖으로 나와 버린 세상의 모든 죄와 재앙 속에서도 견뎌낼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내 판도라의 상자에는

희망은 곧 꿈이다. 나의 오늘을 오늘답게 하는 힘이다. 어떤 힘든 일이 닥쳐와도 끝내는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힘도 바로 그 꿈과 희망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꿈을 꾼다. 당장 이루어질 것인가 아닌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담보하는 사람에겐 결코 그가 기다리는 내일이 오지 않는 것처럼 꿈은 바로 나의 오늘을 멋지게 장식하게 하는 힘인 것이다.

 

꿈을 꿀 땐 가슴이 뛴다. 그 꿈들이 하루하루 쌓여갈 때 나는 판도라가 되어도 좋다. 무엇일까, 어떻게 될까, 그 꿈들이 한데 엮어 놓을 내일의 모습이 바로 희망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이라는 하루하루가 이루어 놓은 결실인 것이다. 살짝 열어 보자. 확 열지 말고 무얼까 궁금해 하며 살며시 열어 보자. 내일의 상자 속에 과연 내 희망의 모습은 무엇일지 뛰는 가슴으로 조금만 열어 보자. 그것이 당신의 오늘을 있게 하는 소중한 힘이 될 것이다.

 

나뭇가지에 푸르름이 완연하다. 봄이 다가온다. 여러분의 얼굴에도 학기 초의 촌티가 다 사라지고 이젠 싱싱한 기운이 넘친다. 강의실에도 운동장에도 함께 모여 파안대소하는 잔디밭 위에도. 그렇다. 이 모든 것이 희망이다.

 

희망은 거창한 게 아닌 하루하루 여러분과 나의 삶의 모습이다. 이 힘찬 기운이 청강의 구석구석에서 힘차게 발하여 함께 꿈꾸는 내일의 청강을 위한 희망이 되게 하자.

그녀의 저 호기심은 그래서 아름답다.

 

 

 

 

글_임동진_청강문화산업대학교 에코디자인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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